마키노 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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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키노 신이치는 일본의 소설가로, 1896년에 태어나 1936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초기에는 사소설을 주로 썼으며, 중기에는 '그리스 마키노'로 불리며 환상 소설을, 만년에는 다시 사소설을 썼다. 그의 작품은 가족, 광기, 불안 등을 다루며, 특히 초기 사소설은 자전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가족 간의 애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중기에는 환상적이고 유머러스한 작품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지만, 만년에는 신경쇠약과 자살로 이어지는 어두운 면모를 보였다. 마키노 신이치의 작품은 2013년 대학 입시 문제에 출제되면서 재조명받았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아버지를 파는 아이」, 「제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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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노 신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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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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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키노 신이치 (まきの しんいち) |
출생일 | 1896년 11월 12일 |
출생지 | JPN 가나가와현아시가라시모군오다와라마치(현 오다와라시) |
사망일 | 1936년 3월 24일 |
사망지 | JPN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오다와라마치 대자 신타마 |
묘소 |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 나카마치 1초메 세이코지 |
직업 | 소설가 |
언어 | 한국어 |
국적 | JPN |
학력 |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학과 |
활동 기간 | 1919년 - 1936년 |
장르 | 사소설, 환상 소설 |
주제 | 가족과 혈족의 인과 심상 풍경, 몽상의 개방 환영과 상실감 |
배우자 | 마키노 세츠 (구 성: 스즈키) |
자녀 | 마키노 히데오 (장남) |
친척 | 마키노 히사오 (아버지), 마키노 에이 (어머니) 마키노 에이지 (동생) 마키노 히데후쿠 (조부) |
영향을 받은 인물 | 다니자키 준이치로, 나카토가와 기치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미겔 데 세르반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괴테, 스위프트, 스턴 |
영향을 준 인물 | 우노 고지, 이부세 마스지 사카구치 안고, 다자이 오사무 이시카와 준, 시마오 도시오 야스오카 쇼타로, 요시유키 준노스케 다네무라 스에히로, 이케우치 오사무 |
데뷔 작품 | 『손톱』 (1919년) 『투전승불』 (1920년) |
대표 작품 | |
주요 작품 | 『아버지를 파는 아이』 (1924년) 『마을의 스토어 파』 (1929년) 『제론』 (1931년) 『귀루촌』 (1934년) |
2. 생애와 경력
마키노 신이치는 이소카이 히데오로부터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작가로 평가받았다.[5] 센고쿠 히데요는 그의 소설을 "동적인 정신의 연소의 장"으로 묘사하며, 이부세 마스지, 사카구치 안고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선구자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2] 그는 사카구치 안고의 『바람 박사』를 극찬하여 안고가 신진 작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우노 코지, 이부세 마스지 등과 교류하며 잡지 『분카』를 창간하여 작품 발표의 장을 만들었다. 대표작으로는 『지구의』, 『아버지를 파는 아이』, 『수박을 먹는 사람』, 『마을의 스토아파』, 『제로온』, 『발란다 이야기』, 『술도둑』, 『귀루촌』 등이 있다.
2. 1. 어린 시절과 문학적 성장 (1896-1919)
1896년 11월 12일,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오다와라정 미도리초(현재의 오다와라역 동쪽 출구 주변)에서, 옛 오다와라번사였던 아버지 마키노 히사오와 어머니 에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7]。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2]。1897년, 신이치가 1세가 채 안 되었을 때 아버지 히사오가 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10년 가까이 그곳에서 지냈는데, 당시 오다와라에는 미국으로의 이민 열풍이 불고 있었고, 인습적인 가풍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아내와 떨어지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다[2][8][10]。 어머니 에이는 초등학교의 준 훈도였기 때문에, 신이치는 조부모의 과잉 보호 속에서 자랐다[9]。
1903년, 오다와라 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부터 외국인 선교사에게 영어 회화와 오르간을 배웠다. 미국의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 등으로 "낯선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사는 미국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다. 이는 훗날 마키노 문학의 모태가 된다[9]。 신이치는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배우는 데 힘썼으며, 훗날 미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도 했다[2]。 아버지의 방랑적인 기질은 신이치에게도 이어져, 이국 취향의 작품 풍조의 근본이 된 것으로 보인다[8]。
1905년, 조부 에이후쿠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히사오는 귀국했지만 가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시가라시모군 고즈촌(현: 고즈정)에 별거했다. 하코네의 후지야 호텔에서 통역이나 가이드 일을 했다. 아버지의 별장을 방문한 신이치와 때로는 영어로 대화했는데, 신이치는 미국에서 돌아온 아버지와는 일본어로는 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었지만, 영어로는 마음속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10]。
1909년, 가나가와 현립 제2중학교(현: 가나가와현립 오다와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동급생 중에는 평생의 친구가 되는 스즈키 주로(후에 요미우리 신문 기자, 훗날 오다와라 시장)가 있었다. 남동생 에이지가 태어났는데, 신이치와는 13살 차이였다. 중학교 시절 신이치는 영어를 잘했고, 학교 내에서는 나팔의 명수로 알려져 있었으며, 꽤 멋쟁이였다고 한다[9]。 조부모에게 과잉 보호를 받으며 자란 도련님 기질은 낙천적이고 활달한 기질을 보이는 한편, 낯가림하는 듯한 수줍은 표정도 생활 속에서 보였다고 한다[8]。 중학교 4, 5학년 무렵에는 2, 3살 연상인 20세의 청과물 상점의 딸에게 첫사랑을 느꼈다[11]。
1914년, 와세다 대학 고등 예과에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1915년에는 원급 예과에 머물게 되었고, 아사하라 로쿠로, 시모무라 치아키 등과 동급생이 되었다. 이때, 오다와라의 유곽의 어린 기생(17, 8세)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한다[11]。 1916년에는 본과에 진급하여, 신이치의 권유로 와세다에 입학한 스즈키 주로와 함께 창작에 대한 의욕을 이야기했다. 도쿄부(도쿄도) 고이시카와구 타카다 토요카와초(현: 도쿄도 분쿄구 메지로다이)의 아마추어 하숙집 2층 방에서, 신이치는 "문학에 대한 정열이 강하게 일어났다"고 말했다[11]。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 등을 접했다[12]。
1919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제2부)를 졸업했다. 스즈키 주로의 의형 겐야 후유지(이와야 사잔나미의 친동생)의 소개로, 지지신보사의 『소년』, 『소녀』의 편집부 기자가 되어, "'''마키노 시치로'''"라는 필명으로 『소녀』에 소녀 소설을 썼다. 같은 해 11월, 대학 동급생인 아사하라 로쿠로, 시모무라 치아키 등 13명과 동인지 『13인』을 창간했다[13]。 12월, 『13인』에 「손톱」을 발표하여, 시마자키 도손에게 인정받았다. 「손톱」에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악마』의 영향이 엿보인다[12]。
2. 2. 문단 데뷔와 초기 사소설 (1920-1926)
1919년(다이쇼 8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제2부)를 졸업하고, 스즈키 쥬로의 의형 겐야 후유지의 소개로 지지신보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마키노 시치로'''라는 필명으로 소녀 소설을 썼다. 같은 해 11월, 대학 동급생들과 동인지 『13인』을 창간하고, 12월에는 「손톱」을 발표하여 시마자키 도손에게 인정받았다.[13][12]1920년(다이쇼 9년) 4월, 스즈키 주로 등과 동인지 『금과 은』을 창간했다(3호로 끝남). 8월, 시마자키 도손의 소개로 잡지 『신소설』에 「凸面鏡|철면경일본어」을 발표하여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으며 문단에 데뷔할 기운이 열렸다. 10월에는 「闘戦勝仏|투전승불일본어」을 동인지 『13인』에 발표했다. 이 작품은 마키노의 처녀작이라고도 하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기린』의 영향이 보인다.[12] 같은 해, 지지신보사 『소녀』의 투고자인 스즈키 세츠와 교제를 시작하여 동거에 들어갔다.[14]
1921년(다이쇼 10년), 사사키 시게사쿠를 통해 나카토가와 키치지를 알게 되었다. 3월, 「백명」을 잡지 『해방』에, 5월에는 「공원으로 가는 길」을 『13인』에, 8월에는 「언덕길의 고독 참미」를 잡지 『인간』에, 9월에는 「치상」을 잡지 『와세다 문학』에 발표하며 신진 작가로 인정받았다. 지지신보사를 그만두고 스즈키 세츠와 결혼하여 오다와라로 돌아갔다.[9]
1922년(다이쇼 11년) 4월, 동인지 『백자』를 창간하고 「연못 주변」을 발표했다. 6월에는 장남 에이유가 태어났다. 9월에는 「편달」을 동인지 『상징』(『금과 은』의 계속 간행지)에, 10월에는 「망상 환자」를 잡지 『신소설』에 발표했다.
1923년(다이쇼 12년), 처자식과 함께 아타미로 이주했다. 6월, 「아타미로」를 잡지 『신조』에 발표했는데, 이는 최초의 “아버지 소설”이 된다. 7월에는 「지구의」를 잡지 『문예춘추』에 발표했다. 9월 1일 간토 대지진으로 오다와라로 돌아갔다. 10월, 나카토가와 키치지의 요청으로 잡지 『수필』 창간(11월)을 위한 협력을 위해 단신 상경하여, 우노 코지, 카사이 젠조, 쿠보타 만타로 등과 알게 되었다.
2. 3. 오다와라 요양과 '그리스 마키노' 시대 (1927-1932)
1927년(쇼와 2년) 신경쇠약에 빠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진출에 밀려 오다와라로 돌아갔다. 치질 때문에 병원을 다녔다. 스즈키 주로의 누나의 도움으로 빌린 오다와라 교외의 해변가 방을 작업실로 했다[17]。 건강 회복을 목표로 해안이나 부근의 산들을 산책했다.1928년(쇼와 3년)에는 작품에 풍부한 몽상이 보이기 시작했다[17]。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괴테의 『파우스트』,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스터언의 『감상 여행』(A Sentimental Journey) 등을 애독하며 작풍의 전환을 꾀했다.
1932년(쇼와 7년)부터 다시 신경쇠약이 재발하기 시작했다. 주거지를 전전할 때마다(작품을 쓸 수 없게 되면 이사를 했다), 아들을 전학시키지 않기 위해 외아들인 히데오를 효세이 초등학교에 편입시켰다. 경제적으로 곤궁했지만, 이는 사카구치 안고의 권유가 있었다고 한다[18]. 점차 생활의 피로가 눈에 띄게 되었다.
2. 4. 신경쇠약 재발과 만년 (1933-1936)
1932년부터 다시 신경쇠약이 재발하기 시작했다. 작품을 쓸 수 없게 되면 이사를 하는 통에 주거지를 전전했는데, 아들을 전학시키지 않기 위해 외아들 히데오를 효세이 초등학교에 편입시켰다. 경제적으로 곤궁했지만, 이는 사카구치 안고의 권유가 있었다고 한다.[18]1933년 3월, 「늪가에서」를 잡지 『신조』에, 「심상 풍경」(속편)을 잡지 『문예춘추』에 발표했다. 의붓 동생 아사오 타츠오를 만나기 위해 미토로 갔다. 5월에는 서긴자의 「키유페루」 2층에서 나카하라 주야를 만났는데, 타니 탄조 등과 동인 잡지에 대한 상담을 위해 모였고 거기에 타니의 권유로 마키노가 왔다고 한다.[19] 여름에는 야마다 촌 촌장 세토 사타로의 소개로 아시가라시모군 오이 촌(현 오이 정)의 우사미가로 이사하여 곤충 채집 등을 했다. 12월에는 「밤의 권 ― 『나의 곤충 채집기』의 한 절」을 잡지 『문예춘추』에 발표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애마 제론이 등장하여 하늘을 질주하는 페가수스에 비할 만한 웅장한 모습을 보였다. 왕성한 집필력을 되찾았다.
1934년 2월, 도쿄시 시나가와구 고탄다의 카스미장에 이사했지만, 곧 경제적인 파탄으로 우울에 빠져 혼자 오다와라로 돌아갔다. 어릴 적부터 친구인 세토 가즈야의 코분도 서점에 머물기도 했다. 8월에는 「박제」를 잡지 『문예춘추』에 발표했는데, 작품의 분위기는 어둡고 주인공이 애마 제론(작중에서는 Z로 등장)에게서 떨어져 짓밟힌다는 비참한 장면이 그려졌다. 또한, 주인공의 꿈에 어머니의 모습이 반복해서 나타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보였다. 가을쯤 상경했다. 12월에는 「귀루촌」을 잡지 『문예춘추』에 발표했는데, 몽상은 어둡고 「의심과 공포」가 넘쳐흐르며 마키노는 「인간 존재의 불안」을 정성껏 써내려가려 했다.
1935년 1월, 요코스카시 산노초의 의붓 동생 아사오 타츠오 집에 갔다. 미우라 반도 주변을 묵어 다니거나, 요코스카와 고탄다 카스미장을 오갔던 해였던 듯하다. 8월, 오가와 카즈오와 공역으로 포의 『유레카』를 시바 서점에서 간행했다. 마키노를 모델로 청동 흉상 「마키노 씨 상」을 제작한 친구 마키 마사오 (조각가)의 부고를 접하고 8월 19일에 추도회를 했다. 12월에는 「눈 녹은 눈」을 잡지 『문예춘추』에 발표했는데, 이 작품에는 "모성 숭배"가 결정된 세계가 나타나 있다. 아내 세츠와의 트러블로 인해 고탄다의 카스미장을 떠나, 스즈키 주로의 도쿄시 혼고구 고마고메 아사카초의 집 2층에 기숙했다.
1936년 1월, 「유령이 나오는 집」을 잡지 『와세다 문학』에 발표했다. 전년부터의 부인 세츠와의 갈등, 치질,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혼자 오다와라의 생가로 돌아갔다. 불면증에 빠졌다. 옛 친구인 세토 가즈야에게 궁핍한 상황을 호소하며 죽음을 생각하고 있음을 전했다. 마키노는 세토에게 "자신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순수한 젊은 여자의 친구다, 하녀라도 좋다. 하지만 상업적인 여자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8] 2월에는 「풍류 여행」을 잡지 『신조』에 발표했다. 3월에는 자선 작품집 『술 도둑』을 시바 서점으로부터 간행했다. 별거 중이던 처자(니혼바시구 도미자와초에 있던 세츠의 친동생·스즈키 타미히라 측)와의 동거를 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월 24일 저녁 무렵, 오다와라정 신타마정의 본가(다이쇼 8년부터의 집)의 벽장에서 스스로 교사를 했다. 향년 39세.
죽음에 이르기 10일 정도 전에 한 번 상경하여, 평생의 친구로 여겨지는 스즈키 주로를 찾아 불면증 악화와 자신의 쓸쓸한 심정을 고백했다.[21]
죽기 며칠 전부터 신문 소설 『벚꽃 잎』의 집필에 막혀, 어머니에게 "소설을 쓸 수 없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 죽어버릴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기 시작했다.[23]
죽은 당일, 나가려는 어머니에게 갑자기 매달려 "제발 나가지 말아줘, 나를 혼자 두지 말아줘"라고 마키노는 간청했다.[18][24] 그 2시간 전쯤에 마키노는 탁구대에 끈을 매달아 목을 넣어 자살 흉내를 냈다고 한다.[18][24] 또, 죽기 전날에는 매실 소주를 한 되 마셨다고 한다.[18]
2. 5. 사후 (1936-현재)
1944년(쇼와 19년), 어머니 에이가 사망했다. 1945년(쇼와 20년), 외아들 장남인 히데오가 뉴기니 비악 섬에서 전사했다.1956년(쇼와 31년), 오다와라시의 세이코지에서 20주기를 맞았다. 새롭게 "마키노 신이치의 묘"가 세워졌다.
1974년(쇼와 49년), 잡지 『문과』가 일본 근대 문학관에서 복각되었다.
1976년(쇼와 51년), 40주기를 맞아 오다와라시 조야마 공원 앞에 "마키노 신이치 문학비"가 세워졌으며, 기념지 『벚꽃잎』이 편집되었다. 문학비에 새겨진 "오랫동안 험악한 방랑 생활 속에서 나의 꿈은 어머니를 그리며 창백해지는 밤이 많았다.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박제』의 첫 부분)는 이부세 마스지에 의해 이 한 구절이 선택되었다.[16][25]

1979년(쇼와 54년), 동생 에이지가 미국의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사망했다.
1986년(쇼와 61년), 사후 50주년 기념 "마키노 신이치전"이 가나가와 현립 근대 문학관에서 개최되었다.
1996년(헤이세이 8년),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향연"이 개최되었다.
2016년(헤이세이 8년), 탄생 120주년 기념 이벤트 & 사촌인 마키노 쿠니오의 사후 30주년 기념 이벤트가 오다와라에서 개최되었다.
3. 작품 세계
이소카이 히데오는 마키노 신이치를 "내발적인 자아 파괴, 상상력의 개방, 분열에 대처하는 패러디 방법의 발견" 등에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가라고 평가했다.[5] 이부세 마스지, 사카구치 안고, 이시카와 준, 다자이 오사무 등을 마키노의 후계자로 꼽았으며,[5] 센고쿠 히데요는 마키노의 소설을 "동적인 정신의 연소의 장"이라고 표현하며 이나가키 다루호, 고지마 노부오, 노사카 아키유키, 고토 아키오 등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2] 시마오 도시오, 요시유키 준노스케, 야스오카 쇼타로 등도 마키노 신이치의 열렬한 팬이었다.[6]
마키노 신이치는 사카구치 안고의 『바람 박사』를 극찬하여 사카구치가 신진 작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18] 우노 코지, 이부세 마스지, 아오야마 지로, 고바야시 히데오, 가와카미 데쓰타로 등과 교류하며 잡지 『분카』를 창간, 이들의 작품 발표 무대를 만들었다.
마키노 신이치의 대표작은 『지구의』, 『아버지를 파는 아이』, 『수박을 먹는 사람』, 『마을의 스토아파』, 『제로온』, 『발란다 이야기』, 『술도둑』, 『귀루촌』, 『나충초』 등이다. 그의 문학은 크게 초기 사소설, 중기 환상 소설, 후기 사소설로 나뉜다.[2][3] 초기와 후기 사소설 중 일부는 "가족과 혈족의 인연"을 다루며 마키노 문학의 "깊은 암부"를 드러낸다.[2][3]
호리키리 나오토는 마키노 신이치가 자연주의적 작풍의 작가로 여겨진다고 했다.[6] 초기 사소설은 가정 내막을 드러낸 자학적인 작품이 특징이며, 만년에는 『귀루촌』, 『나충초』 등으로 "암울한 토속 세계에 육박"했다고 평가했다.[6] 야나기사와 타카코는 초기 작품은 "자학적 수다 및 극화", "예민한 말초 신경 묘사"로 가득하며, 만년 작품도 "밝은 꿈"이 말랐다고 설명한다.[3]
중기에는 "그리스 마키노"라 불리며 낭만적인 환상 소설을 썼는데, 이는 암울한 현실의 반전이며 "농후한 넌센스에 의한 웃음의 문학", "몽마적 세계"를 실현한 것이다.[2][3] 이 시기 작품들은 자연주의적 사소설과 달리 "환상적"이며, "고대 그리스나 중세 유럽의 고전"을 소재로 삼았다.[3][5][6] 1930년에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영향을 받은 「매달린 바구니와 달빛」을 발표했다.[17]
3. 1. 초기 사소설: 가족과 혈족의 인연
마키노 신이치의 문학은 초기 사소설, 중기 환상 소설, 후기 사소설로의 복귀로 나뉜다.[2][3] 호리키리 나오토는 마키노가 자연주의적인 작풍의 작가로 여겨진다고 말했다.[6] 야나기사와 타카코는 초기 작품이 "자학적 수다 및 극화"나 "예민한 말초 신경 묘사"로 가득하다고 설명했다.[3]초기 사소설은 자신의 가정 내막을 드러내는 자학적인 작품들이 특징이며,[6] 이 중 일부는 "가족과 혈족의 인연"을 다루며 마키노 문학의 "깊은 암부"를 보여준다.[2][3] 대표적인 초기 사소설로는 다이쇼 시대의 『아버지를 파는 아이』가 있다.[6]
3. 2. 중기 환상 소설: 몽환과 유머의 세계
마키노 신이치의 문학은 초기 사소설, 중기 환상 소설, 후기 사소설로의 복귀로 나뉜다.[2][3] 이 중 중기의 환상 소설은 '그리스 마키노'라고 불릴 정도로 낭만적이며, 암울한 현실의 반전으로서 "농후한 넌센스에 의한 웃음의 문학", '몽마적 세계'를 구현했다.[2][3]중기의 대표작인 『제론』을 비롯한 이 시기의 작품들은 자연주의적 사소설과는 달리 '환상적'이며, "고대 그리스나 중세 유럽의 고전"을 소재로 한 것이 특징이다.[3][5][6] 1932년(쇼와 7년) 1월, 『문예춘추』에 「술도둑」을 발표하고, 4월에는 『올독물』에 「노로의 친구」를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1933년(쇼와 8년)에는 『문예춘추』에 「밤의 권 ― 『나의 곤충 채집기』의 한 절」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에는 애마 제론이 하늘을 나는 페가수스처럼 웅장하게 묘사되기도 했다.
3. 3. 후기 사소설: 불안과 고독의 심연
마키노 신이치의 문학은 초기 사소설, 중기 환상 소설, 후기 사소설로 나뉜다.[2][3] 후기 사소설은 1934년부터 1936년까지의 작품들로, 이 시기 마키노는 경제적 파탄과 우울증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6]1934년 2월, 도쿄시시나가와구고탄다의 카스미장에 이사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오다와라로 돌아가 친구 세토 가즈야의 코분도 서점에 머물기도 했다. 이 시기 발표된 작품들은 어둡고 비참한 분위기를 띠며, 주인공이 애마에게 버려지거나 어머니의 모습을 꿈에서 보는 등 고독과 불안을 드러낸다. 「귀루촌」에서는 "의심과 공포"가 넘치는 몽상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안"을 묘사했다.[6]
1935년에는 요코스카시와 미우라 반도 주변을 오가며 생활했다. 이 해에는 포의 『유레카』를 번역, 간행하고 친구 마키 마사오 (조각가)의 추도회를 여는 등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아내와의 불화로 혼고구 고마고메 아사카초의 집 2층에 기숙하는 등 개인적인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마키노 신이치는 집안 대대로 미치광이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6][26][27][28][29] 숙부 또한 정신병을 앓았다.[6] 마키노 자신도 작품에서 광기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냈으며,[6][30] 호리키리 나오토는 마키노의 정신이 "항상 위태로운 상태"였다고 분석했다.[6]
중기에는 "그리스 마키노"라 불리며 밝고 경쾌한 환상 소설을 썼지만,[6] 후기에는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자기 상실감, 몰락감"이 깊어졌다고 호리키리 나오토는 설명한다.[6] 신경쇠약을 앓는 "나"를 "귀신"에 비유하는 등[32] 고뇌에 찬 작품들이 늘어났으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4. 평가와 영향
이소카이 히데오는 마키노 신이치를 "내발적인 자아 파괴, 상상력의 개방, 분열에 대처하는 패러디 방법의 발견" 등에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하며, 그의 후계자적인 작가로 이부세 마스지, 사카구치 안고, 이시카와 준, 다자이 오사무 등을 언급했다.[5] 센고쿠 히데요는 마키노의 소설을 "동적인 정신의 연소의 장"으로 비유하며, 이나가키 다루호, 고지마 노부오, 노사카 아키유키, 고토 아키오 등의 선구자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2] 시마오 도시오, 요시유키 준노스케, 야스오카 쇼타로 등도 마키노 신이치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6]
마키노 신이치는 사카구치 안고의 『바람 박사』를 극찬하여 사카구치가 신진 작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우노 코지, 이부세 마스지, 아오야마 지로, 고바야시 히데오, 가와카미 데쓰타로 등과 교류하며 잡지 『분카』를 창간하여 이들의 작품 발표장을 만들었다.
나카하라 주야는 마키노 신이치에 대해 "그 손목은 가늘었다. 유난히 가늘게 느껴졌다. 거기에 월광적인 비애가 감돌고 있었다."라고 묘사하며,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밝음 속에 숨겨진 삶의 비애를 언급했다.[19]
사카구치 안고는 마키노 신이치가 자신의 작품을 칭찬하며 "아,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창백한 네 모습이 그 안에 있어"라고 말했다고 회고하며, 마키노가 "이치를 따질 수 없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혈족과 혈족이 아닌 자를 '저 사람은 정말 창백한 슬픔을 아는 사람이야'라는 말로 구별했다"고 전했다.[18]
마쓰나가 기념관에는 조각가 마키 야오가 제작한 청동 흉상 『마키노 씨상』이 소장되어 있으며, 마키노 신이치는 이 상을 소재로 소설 『제론』을 집필했다.
사후, 사카구치 안고는 마키노 신이치를 "인생을 꿈으로 바꾼 작가"라고 칭하며, 그의 "특수한 설계를 받은 인생" 때문에 "자살", "빈곤", "술꾼"을 감수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자살은 마키노 씨의 제전이었을지도 모른다"며 "그는 마침내 죽음조차도 꿈과 함께 계속 살아간 것이다. 밝은 자살이여!"라고 추모했다.[18]
이후 사카구치는 마키노 신이치를 모델로 한 작가 미에다 쇼키치를 그린 단편 『장난감 상자』를 발표했다. 그는 주인공의 섬세하고 "고상한" 자질을 그리면서도 "꿈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 꿈의 근본이 실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그가 서 있는 현실의 기반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며, 마키노의 "장난감 상자"(꿈, 문학)가 현실에서 유리되었다고 비판했다.[33]
마키노 신이치는 한때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로 평가받기도 했으나, 2013년 대학입시센터시험 국어 현대문(소설) 문제에 『지구의』 전문이 출제되면서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다.[34]
2013년 10월, 일본 에스페란토 협회의 제100회 대회를 기념하여 편찬된 『일본 문학 에스페란토 작품집』에 마키노 신이치의 「뗏목으로 가는 집」(번역 제목: Domo alirebla per Snurpramo)이 수록되었다.
5. 주요 작품 목록
작품명 | 발표 연도 | 비고 |
---|---|---|
손톱 | 1919년 | |
투전승불 | 1920년 | 처녀작 |
지구의 | 1923년 | |
아버지를 파는 아이 | 1924년 | |
수박을 먹는 사람 | 1927년 | |
마을의 스토아 학파 | 1928년 | |
매다는 우리와 달빛 | 1930년 | |
서부극 통신 | 1930년 | |
제론 | 1931년 | |
발란다 이야기 | 1931년 | |
술 도둑 | 1932년 | |
귀신의 문 | 1932년 | |
센가쿠지 부근 | 1932년 | |
덴구동 식객기 | 1933년 | |
의혹의 성 | 1933년 | |
밤의 권 | 1933년 | 「나의 곤충 채집기」의 한 절 |
달빛 | 1934년 | |
찬바람이 불 무렵 | 1934년 | |
박제 | 1934년 | |
귀루촌 | 1934년 | |
치일 | 1935년 | |
나충초 | 1935년 | |
繰り舟で往く家 | 1935년 | |
문학적 자서전 | 1935년 | |
옅은 눈 | 1935년 |
서적명 | 출판사 | 발표 연도 | 비고 |
---|---|---|---|
『아버지를 파는 아이』 | 신초샤 | 1924년 | 신진 작가 총서 |
『마키노 신이치집』 | 헤이본샤 | 1929년 | 『타키이 코사쿠집』과 한 권, 신진 걸작 소설 전집 |
『서부극 통신』 | 슌요도 | 1930년 | |
『마키노 신이치집』 | 슌요도 | 1931년 | 『호소다 타미키・호소다 겐키치・시모무라 치아키집』과 한 권, 메이지 다이쇼 쇼와 문학 전집 |
오가와 카즈오와 공역, 『유레카』 | 시바 서점 | 1935년 | 에드거 앨런 포 |
『귀루촌』 | 시바 서점 | 1936년 | |
『술 도둑』 | 시바 서점, 충적사 | 1936년 | |
『마키노 신이치 전집』 전 3권 | 다이이치 서방 | 1937년 | |
『심상 풍경』 | 소겐샤 | 1940년 | 창원 선서 |
『남풍보』 | 코쵸 쇼린 | 1941년 | 유고, 서문은 시마자키 도손 |
『심상 풍경』 | 서점 유레카 | 1948년 | |
『마키노 신이치집』 | 소겐샤 | 1948년 | 창원 선서 |
『매달린 바구니와 달빛』 | 소겐샤 | 1949년 | 창원 선서 |
『마키노 신이치 전집』 전 3권 | 진분 서원 | 1962년 | 1975년 재간 |
『마키노 신이치 자료 해설 목록』 | 오다와라 시립 도서관 | 1970년 | |
『귀루촌』 | 오분샤 문고 | 1979년 | |
『바랄다 이야기』 | 후쿠다케 문고 | 1990년 | |
『제론・담설』 | 이와나미 문고 | 1990년 | 2003년 재간 |
『일본 환상 문학 전집 15 마키노 신이치』 | 국서 간행회 | 1992년 | |
『마키노 신이치 작품집』 | 충적사 | 1993년 | 다케다 노부아키 편 |
『아버지를 파는 아이・심상 풍경』 | 고단샤 문예 문고 | 1993년 | |
『마키노 신이치 전집』 전 6권 | 지쿠마 서방 | 2002년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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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評説牧野信一
明治書院
1966
[2]
서적
牧野信一・人と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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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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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精堂出版
1988
[4]
서적
ゼーロン 解説
有精堂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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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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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書院
1960-01
[6]
서적
荒武者マキノ
岩波文庫
1990
[7]
문서
吉屋信子、宮沢賢治、村山槐多らがいる
[8]
논문
牧野信一の死
1965-12
[9]
서적
牧野信一 年譜
小学館
1989
[10]
논문
牧野信一の文体の問題――ゼーロンものをめぐって
国文社
1974-06
[11]
서적
空想の中の人生
人文書院
1962
[1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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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06
[13]
문서
十三人
1921-12
[14]
논문
文壇新人論5 牧野信一論
1927-06
[15]
논문
牧野信一論(三)『父を売る子』の文学
1973-06
[16]
논문
蒼ざめた夜の夢――牧野信一の晩年
1984-07
[17]
논문
牧野信一と小田原
1975-05
[18]
논문
牧野さんの死
1936-05
[19]
논문
思ひ出す牧野信一
1936-05
[20]
문서
ゼーロン
[21]
논문
牧野信一の死と芸術
1936-05
[22]
문서
坂口安吾はその頃、牧野からインポテンツに悩んでいたことを打明けられていたという
[23]
뉴스
小説が書けない、と自殺
東京日日新聞
1936-03-25
[24]
논문
牧野信一 母からの逃走
1979-11
[25]
문서
「母を慕ふて」の「ふ」は、正しくは「う」になるが、原文そのままとなっている
[26]
간행물
気狂ひ師匠
1935-11
[27]
간행물
白明
1921-03
[28]
간행물
疳の虫
1921-07
[29]
간행물
妄想患者
1922-10
[30]
간행물
爪
1919-12
[31]
서적
解説 牧野信一
中央公論社
1970
[32]
논문
視線の回帰――牧野信一『鬼涙村』の不安
1987-07
[33]
간행물
オモチャ箱
1947-07
[34]
웹사이트
小林秀雄のせい? センター試験国語平均点が大幅ダウン
https://www.asahi.co[...]
2013-01-24
[35]
웹사이트
小田原文学館
https://www.city.oda[...]
小田原市
2024-01-06
[36]
문서
일본어에서는 '시니치'가 아니라 '싱・이치'와 같이 발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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